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엘리자베스 1세 (문단 편집) === 결혼을 거부하다 === >'''"짐은 국가와 [[결혼]]했다."''' >---- >엘리자베스 1세[* 그녀가 자신의 대관식 반지를 들어보이면서, "짐은 이미 [[잉글랜드]]를 남편으로 섬기고 있노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실제로 그녀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결혼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민들이 붙여준 별명은 버진 퀸.[* The Virgin Queen, 처녀 여왕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야사나 설이 존재한다. 성적으로 흥분하면 강력한 [[질]] 협착증이 찾아와 남성의 [[음경|성기]]를 [[고자|박살내버린다든가]], 생식기가 기형이라거나 하는 소문이 있었으나 이것은 주로 [[가톨릭]] 국가들의 악의에 찬 소문이 대부분이었다. 그녀가 생식이 불가능하다=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라는 소문이 있어 [[에스파냐]] 대사가 특별히 조사를 해 보았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조사 결과 그녀의 생식 능력에는 별 이상이 없다는 결론만 나왔다. 사실은 결혼하지 않았을 뿐 이미 수십 명의 남자를 침대로 끌여들였다는 등의 악질적인 소문도 존재했다. 대부분은 정적들이 퍼트린 험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증명됐지만, 이후로도 소문은 종종 살아남아서 몇몇 인물이 여왕의 사생아일 것이라는 이야기가 남기도 했다. 심지어 그녀와 같은 시대 인물인 [[셰익스피어]]마저 그녀의 사생아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할 지경이었다. 본인이 예전에, [[메리 1세]]가 추진하던 자신의 정략결혼에 반대하면서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본인이 위와 같은 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브리태니커를 비롯한 각종 사전에서도 엘리자베스 1세의 결혼 추진 및 실패에 관련된 이야기는 상세히 다루고 있지만, 위와 같은 그런 말을 했다는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일단 [[헨리 8세]]가 국교를 [[성공회]]로 갈아치운 후에도 왕족들이 정통 기독교 국가의 왕가와 혼인 관계를 맺는 문제로 자주 구설수에 올랐는데, 엘리자베스 1세는 혼인 제의가 들어와도 임하는 척하면서 성사시키지 않는 식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잉글랜드와 결혼한 여왕"이란 예찬 분위기가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 이런 점에서 본인이 이야기를 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그녀가 결혼하지 않은 이유는 사가들 사이에선 크게 '''부군과 권력을 나누기 싫어서'''[* 당시의 가부장적 가치관으로 인해 설령 여왕이라 해도 결혼하게 되면 남편에게 복종해야 했다. 어디까지나 여성은 남성의 부속물인 시대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물론 예외는 있었다]].]와 성장하면서 안 좋은 결혼 관계를 많이 봐 왔기 때문에[* 친어머니 앤 불린의 불행한 결혼, 의붓어머니 [[캐서린 파]]의 불행한 결혼, 이복언니 [[메리 1세]]의 불운한 결혼 등 전례는 많았다. 게다가 귀족들 사이에서도 별거와 이혼이 비일비재했다. 이후의 일이긴 하나 [[메리 여왕(스코틀랜드)|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역시 결혼으로 인해 추문을 남긴 훌륭한(?) 전례이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1세는 '''그 유명한 [[헨리 8세]]의 딸'''이다.] 결혼을 싫어하게 된 거라고 추정하고 있다. 사실상 그녀의 결혼은 문제가 많았다. 신교 국가인 북유럽을 포함해서 그녀 자신과 비슷한 신분을 지닌 외국의 왕족은 대부분 [[가톨릭]] 교도였기에, 이들 중에서 남편을 택할 경우 잉글랜드 국교회가 흔들릴 것이며 외세의 간섭 또한 심해질 것이었다. 실제로 [[메리 1세]]가 잉글랜드인들에게 인기를 잃은 이유 중 하나는 이 때문이었다.[* 상세한 건 [[메리 1세]] 항목 참고.] 자국의 신하와 결혼하는 것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있음이 명백했다. [[메리 여왕(스코틀랜드)|스코틀랜드 여왕 메리]]가 명백한 예였다.[* 그녀는 원래 프랑스의 왕비였으나, 프랑스 왕 [[프랑수아 2세]]가 죽고 자국으로 돌아와 스코틀랜드 귀족인 [[헨리 스튜어트|단리 경]]과 결혼했다. 그러나 단리와 곧 사이가 나빠져 그에 의해 모반이 일어날 뻔하기도 했다. 이렇듯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남자와의 결혼은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킴과 동시에 왕위에도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관념상 여성이, 그것도 한 나라의 여왕이 결혼하지 않고 후사를 갖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결혼은 두고 두고 문젯거리가 되었다. 프랑스와 에스파냐 등 외세로 둘러싸인 잉글랜드에서 미혼이라는 그녀의 신분이 가장 큰 자산이었기에 결혼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결혼 교섭이 진행될 여지가 있다면 각국에서 침략을 개시할 이유가 없다.] 혼담 진행 과정을 보면 혼담이 들어올 때마다 대부분 반가워하며,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하는 모습을 보이다, 진전이 이뤄지면 상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내걸어[* 종교, 비용, 영토 등] 파혼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각각 근거가 있는 주장이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분명히 말한 적이 없으므로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다. 엘리자베스는 결혼하지 않았기에 나중에는 성녀처럼 공경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결혼하지 않고 자식조차 두지 않은 탓에 국내에서는 계속 후계자가 없다는 점이 불안 요소로 작용했다. 여왕이 갑자기 사망하기라도 할 경우 왕위를 둘러싼 혼란은 불 보듯 뻔하거니와 최악의 경우 가톨릭 국가가 지지하는 가톨릭교도가 왕위에 오르게 될 수도 있었다. 이것은 신하들에겐 골칫거리였고 신하들은 그녀에게 제발 결혼하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여왕은 언제나 결혼할 듯 하면서 결혼하지 않았다. 그러다 나이 40살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신하들도 여왕의 혼담에 대해서 찬성보다 반대 입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노산으로 인한 여왕의 갑작스런 죽음이 걱정됐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출산]]하다 사망하는 여인이 드물지 않은데, 노산이 예상되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신하들은 결국 여왕 폐하께서 [[만수무강]]하시기만 바랄 수밖에 없었다. 단 한번 약혼까지 한 적이 있는데 상대는 프랑스의 [[앙리 2세]]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막내아들인 앙주 공작 프랑수아 왕자였다. 이 때는 여왕의 나이가 이미 46세로 후사를 볼 가능성이 없어 후계가 꼬일 가능성이 없기도 했고, 당시 22세였던 프랑수아가 청혼을 위해 직접 잉글랜드에 찾아오자 아들뻘인 이 젊은이를 매우 마음에 들어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여왕은 신하에게 "앙주 공작이 못생겼다고 들었는데[* 어렸을 적 앓은 천연두로 곰보 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직접 보니 괜찮다"고 말했고 이내 '나의 개구리'라는 애칭까지 붙여주면서 귀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그와의 결혼도 불발되었는데, 네덜란드의 국가원수로 초빙되어 갔던 프랑수아가 안트베르펜에서 반대 세력에게 대패하고 쫓겨나자 자신의 평판에 흠이 갈 것을 염려했던 엘리자베스 여왕 측이 파혼한 것이다. 자신이 다스릴 예정이었던 나라와 결혼하게 될 여왕까지 모두 잃은 프랑수아는 1년 뒤에 전염병으로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